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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여지도 조회
바다를 담은 시
닉네임관리자 작성일2017-09-26 조회수26474
첨부파일
P04-05 강화 민머루해수욕장 이미지입니다.

바다를 담은 시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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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린다

 

글 이대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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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어서 이별의 방식으로 ‘삼십육계’를 선택했던 적이 있다. 비겁한 선택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그녀라는 섬에 묶어두어서 도덕적으로는 지탄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비열한 행위였다. 바다를 지나면서, 산을 오르면서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과연 그녀를 사랑하기는 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하체만의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은 다 그런 것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사랑이라는 관념을 고집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를 들이려 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도망은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와의 부딪힘으로 튕겨 나간 것이라는 인식이 든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나는 나마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으면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그것은 조작된 경전을 믿는 광신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시절에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막연한 그리움이나 동경 같은 것이었다. 자기합리화를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써 그녀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감정으로 입술을 빨고 육체적 접촉을 꾀했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대부분의 사랑은 이러한 질문 앞에서 비로소 사랑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의 완성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지혜롭지 않은, 미친 사랑쯤으로 기록하고 싶다.

이제는 먼 섬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를 ‘격렬비열도’라고 불러본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린다. 한 때나마 목숨을 걸어보았던, 그 치기어린 시절의 사랑.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이면, 놓친 여자의 눈물처럼, 음악 같은 비도 내린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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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흠.png 이미지입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 생,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장편소설 『청앵』,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수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애지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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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8